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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케리 백인범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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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케리

(William Carey, 1761-1834)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 윌리엄 케리

  

이것은 윌리암 케리의 좌우명이다. 검소한 집안 출신인 영국의 침례교 목사 윌리암 케리는 개신교에서 근대 해외 선교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되는 사람이다. 케리 이전에도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인도가 가서 복음을 전했으나 케리 자신의 비전과 그의 놀라운 근면성, 그리고 그가 창립한 기관들의 성격이 19세기의 선교 운동을 실제로 주도했다. 그의 업적이 영어를 사용하는 선교의 중추적인 출발점이 되었고 그가 손을 댄 모든 것들이 그의 열성과 인내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영향력이 의해 변화되었다.

케리의 초년 생활에서는 그가 미래에 얻게 될 명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그의 일생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믿음, 근면과 순종을 사용하셔서 엄청난 반대를 극복하게 하시는 지를 보여 주는 훌륭한 예이다. 케리는 영국 노스앰튼사이어에서 자랐으며 어렸을 때에는 구두수선공의 기술을 배웠다.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대부분 스스로 학습한 것이며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다. 세상의 길을 따라 방황하는 시기를 거친 후 17세에 케리는 변화를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께 의존하게 되었으며 곧 침례교인이 되었다. 집에서 자랄 때에 케리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었으며 구두 수선 가게에서 일하면서 그는 신약 성경을 헬라어로 읽을 수 있도록 스스로 학습하게 되었다.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미게 되었으나 가난했고 종종 굶주리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는 구두 수선공의 일 외에도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에게 세계 지리를 가르치면서 세계에 대한 케리의 비전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가 쿡크 선장의 항해에 대한 책들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에서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놀라운 것들을 기대하라.”

  케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 사역뿐만 아니라 선교를 위해 자신이 부름 받았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인근 침례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인관계가 확장됨에 따라 그는 다른 목회자들과 외국 선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해외에 선교하기 위해 나가는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믿음으로 가득차었다. 케리는 겸손하고 친절한 평민이었으며 그가 사역하고 설교를 할 때 종종 선교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으며 열심히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들을 주시리라고 기대했다. 수년간의 학습기간과 많은 기도, 그리고 단체를 하나 세우자는 지속적인 간청이 있은 후에 마침내 그는 침례교 목사들의 지원을 얻게 되었으며 1792년에 해외선교협회를 세우게되었다. 그러나 케리는 침례교 선교협회에 대해 꿈을 꾸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 형성된 협회의 지원 하에 해외로 나가는 첫 선교사가 되고자 희망했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

케리의 믿음과 비전은 용감한 담대성과 근면과 희생에 대한 헌신과 연결되었다. 그는 1793117일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에서 거룩한 용도를 위해 희생양처럼 헌신하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위대한 임무입니다. 저는 힌두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동인도의 벵골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1793년 가을, 협회의 첫 선교사로서 인도를 향해 출발했으며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기서도 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속적인 직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케리는 세부적인 것들을 다 기록한 일기를 썼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내면적인 생각에 대해 알 수 있다. 그의 일기 속에는 다양한 고난들이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그는 그가 섬기기 위해 온 사람들의 죄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복음이 열매 맺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는 선교사로서 자신이 적합하지 못하다는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나는 보다 영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으며 보다 복음적인 정신 상태가 내게 필요하다. 나는 진실한 믿음이 내게 충만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내게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과 준비가 너무도 필요하다.“ 마지못해 그와 함께 인도로 동행했던 그의 부인은 그의 사역에 대해 협조적이지 못했으며 정신 질환을 앓게 되어서 마침내 시설에 수용되어야만 했다. 케리는 온유하고 나와 마음이 맞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며 참으로 좋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역경과 실망들이 그의 사역을 방해하지는 못했으며 그는 즉시 언어를 습득하는 일에 착수했다. 케리는 창의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며 교사나 설교자로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일에 열중하는 능력을 지녔었고 뛰어난 관찰력과 세부적인 상황을 잘 기억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힘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비전에 대한 순종과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마무리하고자 하는 그의 강한 결심에 있었다. 그는 매일 그의 모든 힘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만 활용했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에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행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선정했으며 이는 종종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일시적인 만족을 거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윌리암 케리가 이룬 업적은 무엇인가?

그는 아시아에서 최초의 기독교 대학을 창설했다. 세람포르 대학은 오늘도 건재하다. 세람포르 대학에서 케리의 지도 하에 약 수심만 권의 성경과 복음서가 인도에서 여러 언어와 방언으로 출판되었다. 벵골어로 된 성경 이후에도 마라타어와 타밀어로 된 성경이 출판되었다. 모두 합해 그는 스물여섯 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된 번역서를 출판했으며 그 과정 가운데 그는 수많은 문법서, 사전, 그리고 언어 학습서를 출판했다. 케리 자신은 1801년에 포트 윌리암 대학의 산스크리트, 벵골어, 그리고 마라타어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사망한 인도인의 과부를 화형시키는 인도의 관습인 수티 제도에 대한 그의 반대는 그 관습을 폐지시키는 데에 공헌했다. 무엇보다도 사역에 대한 그의 헌신은 후세에 온 수많은 선교사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우리가 받은 보잘 것 없는 은사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힘을 다해 이 은사들을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실 수 있겠는가? 윌리암 케리의 인생은 달란트의 비유를 연상케 하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가 아닌 두 달란트를 받은 자를 생각하게 한다. 이 사람은 효율적으로 투자했으며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두 달란트를 더 돌려드릴 수 있었다. 케리는 그가 받은 특별한 은사를 솔직히 인정했으며 그의 온 정성을 다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믿음, 기도, 그리고 비전의 인물로서 케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기대했었다. 순종의 사람으로서 그는 그의 제한된 능력과 엄청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했다. 그리고 충성된 종으로서 케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성취했으며 이러한 업적의 바탕에는 순종과 근면이 있었다. 그의 삶에서 중심 되는 성격을 적절히 설명한 케리 자신의 말을 인용하자면 나는 꾸준히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인내할 수 있다. 이에 내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제임스 E, 브래들리 / 풀러 신학교 교회역사학 교수

 

생명의 삶 - 19952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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