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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D.L 무디) 백인범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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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D. L 무디 지음 / 차한 옮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고,

너희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

( 요한일서 5:13)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 다니지만 회개하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획해 놓으신 자리를 취하려 하지 않고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

 

혹자는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상당수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의 구원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특권입니다. 의심이 가득한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해 있어서 해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는 없습니다. 내 자신이 먼저 굳건한 바위에 있어야만 그 후에 내 형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눈 먼 상태에서 다른 눈 먼 사람에게 보게 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먼저 당신부터 나은 후에 나에게 말해 주세요." 최근에 나는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죄를 이기지 못하여 무서운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늘 붙어다니는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의 죄를 이기지 못하므로 의심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시간이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의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 서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의심과 불확실이 있는 곳에는 어떤 휴식도, 기쁨도, 평화도 - 어떤 자유함이나 능력도 - 없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탄의 3가지 간계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탄은 자기의 모든 왕국을 움직여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 다음 사탄은 우리가 "의심의 성"으로 들어가도록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명백히 알리는 증거를 한다면 사탄은 우리의 인격을 더럽혀서 우리의 증거가 거짓임을 드러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입니다.

 

의심을 갖지 않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의심은 하나님을 매우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의심

 

누가 한 사람을 30년 동안 알아오면서 한번도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10, 20, 혹은 30년 동안 알아왔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바울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 및 순교자들이 만약 그들이 의심이 꽉차서 화형을 당한 후에 천국에 갈 지 아니면 지옥에 갈 지를 모른다면 그들이 당한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펄젼(C. H. Spurgeon)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황새가 전나무를 보고 그곳에 둥우리를 지을 권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는 말과 토끼가 바위에게로 달려가는 데 허가가 있어야 하는 지를 물어 본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 지에 관해 항상 의심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들은 곧 소멸될 것입니다. 황새가 자기자신에게 말합니다. '아하 여기 전나무가 있구나' 그리고 자기 짝과 상의합니다. '우리 새끼들을 기를 둥지를 틀기에 이 나무가 괜찮겠지?' 그 짝은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황새들은 재료들을 모으고 주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둥지를 지어도 될까?'를 논의하지 않고 그들은 나뭇가지를 가져와서 둥지를 만듭니다. 바위 위에 있는 야생염소는 '내가 여기 있을 권리가 있을까?'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염소는 어딘가에 있어야 하죠. 그에게 꼭 알맞은 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염소는 그 바위 위에서 뛰놉니다. 이런 말 못하는 동물들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을 아는데 죄인은 그의 구원자께서 예비하신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핑계를 대거나 의심합니다. '내가 감히?', '그건 나를 위한 게 아닐꺼야', '나를 위한 것일 리 없어', '그건 너무 좋아, 사실이 아닐꺼야'.

 

아직까지 황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전나무에 누가 둥지를 짓더라도 결코 이 둥지는 헐리지 않으리라.' 또한 토끼가 다음과 같은 영감의 말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누가 이 바위틈으로 달려갈 지라도 결코 거기서 쫓겨나지 않으리라.' 만약 그랬다면 확신이 배로 증가했을 것입니다. 여기 죄인들을 위해 예비된 그리스도, 즉 죄인들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구원자가 계십니다. 그리고 격려의 말씀도 덧붙여져 있습니다: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게 오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얻게 되리라.' "

 

믿는 이가 소유한 영원한 생명

 

이제 말씀(the Word)으로 돌아갑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서신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왕국에서 우리의 변호자(Advocate)로서 우리를 위해 하시고 계신 일을 가르쳐 줍니다. 그의 복음서에서 "믿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곳은 두 장밖에 없습니다. 이 두 장을 제외한 요한복음의 모든 장은 "믿으시오! 믿으시오!! 믿으시오!!!"입니다.

 

그는 요한복음 2031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요한복음을 쓴 목적 -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복음 20:31) - 입니다.

 

요한일서 513절로 돌아갑시다. 거기서 그는 이 서신서를 쓴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며,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니라." 이 첫번째 서신은 겨우 5개의 짧은 장으로 되어 있지만 "알다" 라는 단어가 40번 이상 나옵니다. 요한일서는 "알라! 알라!! 알라!!!"입니다. 요한일서의 핵심은 알라!이며 서신서 전체를 통해 그 반복구 -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라" - 가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나는 몇년 전 봄에 미시시피강을 따라 1,200마일을 갔습니다. 매일 저녁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남자들 때로는 여자들이 정부에서 만든 등대불을 켜기 위해 강의 한쪽 기슭을 따라 노새 또는 말을 타고 올라오거나 때로는 걸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항해 중에 있는 항해사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그 거대한 강 전체를 따라가며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말해주는 불빛 혹은 이정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증거들을 검토해 보는 것입니댜.

 

5가지 진실들

 

요한일서 3장에 알 만한 가치가 있는 5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시려고 나타나신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사역에서 실패하셨습니까? 그분께서 오신 목적을 이루실 수 없으십니까? 지금까지 하늘이 보낸 사람치고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패하실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셨습니다.

 

, 두 번째 사실이 19절에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그분 앞에서 우리 마음을 든든히 하리니."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한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면 진실로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6)

 

세 번째 사실은 14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 알거니와 "

 

자연인(natural man)은 경건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경건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그 사람에게는 영적 생명이 없습니다.

 

네 번째 사실을 2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에 의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우리가 정도는 다르지만 본질상 똑같은 그리스도의 영 - 그리스도를 닮은 영 - 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온유하고 친절하며 관대한가, 내가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한 영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오래 참고, 친절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는가 - 이것이 바로 시금석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영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사실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지금은" "지금은"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당신이 언제 죽게 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장차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2)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지구상에 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죄를 지은 적이 없거나, 또는 앞으로 짓지 않을 영혼은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죄를 위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요한일서 21절로 돌아갑시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짓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지어도,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가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시라. "

 

여기서 요한은 의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 우리에게" - 요한 자신을 포함하고 있음 - "아버지와 함께 계신 변호자가 계시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변호자라니요! 예수님께서 바로 그 최상의 자리 - 하나님의 왕좌 - 위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힘쓰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한복음 16:7) 그분께서는 우리의 대성직자(high priest)가 되시기 위해, 또한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기 위해 떠나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변호하시기 힘든 경우도 있었지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께 당신의 영원한 소유권(interests)을 맡긴다면 그분께서는 "이제는 능히 너희를 지키사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너희를 자신의 영광의 임재앞에 흠이 없이 넘치는 기쁨으로 서게 하실"것입니다.(유다서 24)

 

용서받은 과거의 죄들

 

죄를 자백하는 순간에. 다시 그 죄를 언급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죄가 치워졌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더이상 언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내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내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그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팔로 내 목을 껴안고 말합니다. "아빠, 아빠가 나보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나는 "그럼 용서하구말구, 내 아들아"라고 말하면서 아들을 끌어 안아줍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눈물을 닦고 기뻐하면서 물러갑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자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어제 내가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면 좋겠어요." "얘야, 그 일은 다 해결되었어. 그러니 그것을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해요. '내가 너를 용서하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싶어요." 이것이 나를 존경하는 것일까요? 내 아들로 하여금 나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들의 마음을 생각하고 다시 말합니다. "얘야, 내가 너를 용서한단다"

 

그런데 그 다음날 되어 아들이 또다시 지나간 죄를 꺼내어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나를 정말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셨다면 지나간 것을 다시 언급하지 맙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해 푯대를 향하여 나아갑시다. 과거의 죄를 잊어버리십시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가 법정에서도 인정된다는 것을 말해 둡니다. 어떤 나라 - 어디라고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 의 법정에서 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한 남자와 그 아내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내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아내를 법정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남편이 아내를 용서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재판관은 그 일이 다 해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재판관은 한 번 용서받은 죄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하는 원리가 바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온 세상의 심판주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는 다시 그 문제를 꺼내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면 우리의 죄는 영원토록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죄를 자백함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

 

고린도후서 135절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면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스스로 증명해 보라 너희가 버리운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 자신과 당신의 믿음을 살펴보십시오. 당신은 원수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알아보는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당신이 받은 모욕이나 당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용서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당신은 잘하고 있는 일을 비난받을 때 불평없이 비난받을 수 있습니까? 다른 이들이 당신을 잘못 판단하고 잘못 말할 때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알 수 있는 다른 좋은 방법은 갈라디아서 5장에 있는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친절과 양선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러한 것에 대항할 법이 없느니라." 만일 내가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면 성령을 또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없으면 오렌지가 열릴 수 없듯이 성령이 없으면 그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가 좋다면 열매 또한 좋을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로마서 89절에서 바울은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분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지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외적인 모습들을 보여왔던 사람이라도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바울의 생애를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삶과 비교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의 삶과 그의 삶이 비슷하다면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고 하는, 즉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증거입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

 

그렇지만 비록 당신이 거듭났더라도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지만 성화(聖化: sanctification)되는 것은 일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혜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직 은혜 안에서 그리고 우리 주님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고 했고, 또한 그의 두번째 편지의 1장에서 "이뿐아니라 전심 전력을 다하여 ,너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의 다정함을; 형제의 다정함에 사랑을 더하라. 만일 이런 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하게 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빈약하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야 합니다. 나무는 일년 안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는 있지만 완전히 성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자녀이긴 하지만 성숙된 그리스도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매우 중요한 장이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14절에 사도는 말하길 "무릇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수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군사는 대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학생은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고, 여행자는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진실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또 다른 사실에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거의 모든 바울의 서신서에서 구원의 확신에 관한 교리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절에서 그는 이야기하기를 "땅에 속한 우리의 집인 장막이 해체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한 건물, 곧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하늘들 안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위에 있는 집에 대해 말을 할 때 "압니다"라고 언급함으로써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또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바램을 가졌노라."(빌립보서 123)라고 말했는데, 바울이 이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골로새서 34절에서 그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왓츠 박사의 묘비에 이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골로새서 112절로 되돌아가 봅시다.

 

"우리를 빛 가운데서 성도의 상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 세 가지, '합당하게 하시고'(hath made) '건져내시고'(hath delivered) '옮기신'(hath translated) 일들은 장차 될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완료된 완료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거나 아니면 못 받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왕국에 들어가기까지, 또는 서로 쳐다보며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건축물, 곧 손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린도 후서 5:1) 라고 얘기할 때까지 쉬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32절을 보면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신 그분께서, 어찌 그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셨다면, 그분께서 우리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0,000달러 빚진 사람이 파산하게 되자, 친구가 와서 모두를 지불했습니다. 후에 그가 몇 달러를 더 빚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큰 빚도 값아 준 사람이 작은 것도 값아 줄 거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라고 말씀하신 확실한 보증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깨닫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두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 3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소하리요?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실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주를 위하여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복자 그 이상이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

 

하늘에 기록된 이름

 

구원의 확신은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당신을 위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내가 압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이가 나를 또한 저주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도, 천사도, 마귀도 우리나 그분께 대해 어떠한 고발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일을 완벽하게 하실 것입니다.

 

욥은 우리보다 암흑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욥기 1925절에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훗날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실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확신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마지막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바로 그 날을 대비하여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나는 압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의심의 차원이 아니라 지식의 차원입니다.

 

성경에서는 의심을 표현하기 위해 '소망'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또한 '나는 미국인이었으면 좋겠다' 또는 '결혼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라거나 '그러한 모임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이 나라에 이미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 오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찾기만하면 그분은 우리에게서 떠나시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리를 칠십 명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공에 고양되어서 말하였습니다.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조차 우리에게 복종하더이다." 주님은 그들을 점검해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곤 그들이 기뻐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지라도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기뻐하라."(누가복음 10:20)

 

보장된 구원

 

의심없이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 모두의 특권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부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이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한복음 5:24)

 

어떤 이들은 당신이 위대한 흰 왕좌 심판대 앞에 나아가서야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 만일 당신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면 당신은 죄에 대해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보상을 위해 심판받을 지는 모릅니다. 이것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의 비유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져와서, 말하되, 주님, 제게 다섯 달란트를 맡겨 주셨는데: 보소서, 제가 또 다섯 달란트를 벌었나이다. 주인이 말하되, 잘하였도다, 선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맡겨 다스리게 하리니: 네 주인의 기쁨에 동참할지어다 하고"(마태복음 25:20-21) 우리는 청지기 역할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는 구원과는 다른 일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빚을 하나님께서 다시 또 요구하시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면 나 또한 그것에 대해 합당하게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이사야는 우리에게 "그러나 그분께서 상함은 우리의 범법을 인함이요 그분께서 상처를 입음은 우리의 불법을 인함이라. 우리 평화를 위한 징계가 그분 위에 내려졌고,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들로 인해 넘겨지셨으며,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요한복음 109절에 보면 "나는 그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 27절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결코 멸망치 않을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내갈 자가 없으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내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시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단지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뿐만이 아니라,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나님의 세 분들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자녀

 

오늘날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증거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습관은 항상 의심을 낳습니다. 내가 만일 어떤 사람과 내일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 데 나에게 약속을 지킨다는 증거로 시계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내 진실성을 의심하는 모욕적인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에 걸쳐 말씀해 주셨고 여러 번에 걸쳐 묘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그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선한 목자라 ...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느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진리이다; 나를 영접하라 그러면 진리를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진리의 체현(體現: enbodiment)이로라." "길을 알기 원하느냐? 나는 길이다 :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왕국으로 인도하리라" "의에 주리었느냐? 나는 생명의 양식이다. 내게 와서 먹으면 주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생명의 물이다 이 물을 마시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너희 안에 있게 될 것이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25-26)

 

우리의 의심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집에 들어가면 종과 아들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아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온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지만 하인은 같은 집에 있어도 아들같지 않아서 아래 쪽에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하인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자녀로 삼지 않으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집 작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어떠한 모습을 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14살이 된 지금까지 내 아들입니다. 비록 선생님들이나 다스리는 자들에게 훈련을 받아야 할 지 모르지만 그는 내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완전하진 않지만 확실히 그분의 자녀입니다.

 

또 다른 의심의 근원은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참하고 비통해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의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싶다면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그 마음을 주께 위탁하는 자를 완전한 평강 안에 지키시리니 ..."(이사야 26:3)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당연히 누려야 할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보는 방법 세 가지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라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비참하게 되길 원한다면 당신 속 안을 바라보면 되고 마음이 산만해지길 희망한다면 주변을 둘러보면 됩니다. 그러나 당신 이 평강을 소유하기 원한다면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을 보자 곧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대리석이나 화강암이나 강철보다도 더 훌륭한, 단지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께로부터 눈을 돌리는 순간 그냥 가라앉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 보는 사람들은 걸음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불명예스러운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분을 똑바로 바라보길 원합니다.

 

소년 시절 나는 앞에 있는 나무나 어떤 목표물에 눈을 고정시키고서야 눈 위에 똑바른 발자국 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내 눈을 앞에 있는 표적에서 돌리는 순간 나는 똑바로 걷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평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킬 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누가복음 24:40) 그것이 제자들이 지닌 평강의 근원이었습니다.

 

당신이 의심을 떨쳐 버리기 원하신다면 피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의심을 증대시키기 원하신다면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2-3일 동안 자기 자신에 집착함으로해서 수년 동안 의심을 품고 지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며 당신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바라보지 말고;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시며 그분께서 무엇을 행하셨는 지를 주시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평강과 쉼을 얻게 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해방선언

 

아브라함 링컨이 삼백만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 날 노예들을 묶고 있던 사슬이 풀어지고 그들은 자유로와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선언은 북군이 진주하는 곳마다 나무나 울타리에 내 걸리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노예들이 글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선언을 읽었고 읽은 사람 대부분은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인가 기쁨의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몇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해서 자기들의 옛 주인과 함께 그대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변경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대장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들의 감정이 노예생활에서 자유를 얻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밖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라일(Ryle) 감독은 놀라운 얘기를 하였습니다. "믿음은 뿌리이고 확신은 꽃입니다." 단언컨대 당신은 뿌리 없는 꽃은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꽃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뿌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불쌍한 여인이 무리 가운데서 예수님 뒤로 나와 떨면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 곧 믿음입니다.(마가복음 5:27) 스데반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자들 가운데 가만히 서서 "보라 하늘들이 열린 것과 사람의 아들께서 하나님 오른 편에 서 계심을 내가 보는도다."(사도행전 7:56)고 말한 것이 곧 확신입니다. 십자가에서 강도가 "주님 나를 기억해주옵소서."(누가복음 23:42)라고 부르짖은 것이 곧 믿음입니다. 욥이 온 몸에 욕창이 생긴 가운데 잿더미 속에 앉아서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 "비록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하더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고 말한 것이 확신입니다.(욥기 19:25, 13:15) 베드로가 물에 빠져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 부르짖던 것이 곧 믿음입니다.(마태복음 24:30) 베드로가 그"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건축자들에게서 무시받은 돌인데 모퉁이의 모통잇돌이 되셨느니라. 또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어떤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선언한 것이 곧 확신입니다.(사도행전 4:11,12)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마가복음 9:2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걸어 고소하겠느뇨? 정죄하는 자가 누구뇨?"라며 담대하게 도전하는 것이 곧 확신입니다.(로마서 8:33,34) 사울이 다마스커스의 유다의 집에서 홀로 눈먼 상태로 슬픔에 잠겨 기도한 것이 믿음입니다.(사도행전 9:11) 바울이 연로한 죄수로서 무덤을 조용히 주시하며, "내가 믿어온 자를 내가 아노라." "나를 위하여 왕관이 예비되었노라"라고 말하는 것이 곧 확신인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얼마나 커다란 복인지요! 생명과 사망 사이의 간격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생명은 종국에 이르기까지 약하고, 병들고, 건강치 못하고, 고통스럽고, 애써야하고, 불안하고, 초췌하고, 짐스럽고, 기쁨이 없고, 웃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확신은 생명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함이며, 힘이며, 능력이며, 정력이며, 활동이며, 에너지이며, 남성다움이며,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어느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얘기를 합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바위에서부터 자라나와서 깎아 지른 듯한 절벽에 걸리어 포효하는 폭포수나 길게 떨어지는 물줄기 위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자기 위치를 유지하면서 마치 울창한 삼림 속에 있는 것처럼 잎과 가지들을 뻗쳐 내더군요." 그것들이 안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은 바위 위에 붙어 있기 때문이며 그 생명이 지속되는 것은 자연의 작용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인들도 종종 하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매우 끔찍한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만, 그들은 완전히 안전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그분을 붙잡는 것이 자기들에겐 보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복주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며 생명 안에서 삶을 유지해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나무와 바위가 분리될 수 있으려면 먼저 나무가 죽던가 아니면 바위가 굴러 떨어지던가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이 영적인 생명을 잃거나 그 바위가 무너져야만 신앙인과 그 바위(the Rock) 되시는 분과의 연합이 붕괴될 수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 가는 길 (D. L 무디 지음, 차한 옮김, 안티오크 펴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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