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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상실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권위 백인범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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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lchurch1999.onmam.com/bbs/bbsView/10/5733892

교회 안에서 상실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권위

 

 

 

A.W 토저 / 번역 이호영

(A.W Tozer, 1897-1963)

 

 

저의 마음에 지금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무슨 특별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저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직 강권된 사랑에 의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동료 크리스천들과 논쟁하고 나서 제 마음이 격분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러한 논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제껏 전 어느 누구에게도 욕을 먹거나, 비난을 받거나, 공격을 당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여기서 제시한 내용들은 제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던 중에 겪었던 어떤 불쾌한 경험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물론이요, 다른 교파에 속한 크리스천들과도 저는 우호적이고, 서로를 존중해 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다만 제가 느끼는 큰 슬픔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 안에 보편화된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상황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 제 자신 역시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에즈라(Ezra)가 행악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때, 자신을 포함시켜 기도한 것처럼 저 역시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제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나의 하나님, 주께, 제 얼굴을 들지 못하나이다. 이는 우리의 불법들이 더하여 우리 정수리 위에 넘치고 우리의 범과가 커서 하늘들에 미침이니이다."(에즈라 9:6)

 

이 글에서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는 격한 표현은 제 머리 위에도 돌아와야 마땅합니다. 저 역시 죄인입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다만 우리 모두가 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 다시는 그분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지 말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왜 마음에 무거운 짐을 느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원인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자칭(自稱)하는 무리들 가운데서 거의 혹은 전혀 권위를 갖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이나, 자유주의자들이나, 이와 유사한 사이비 이단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그룹들로, 여기에는 주님과 사도들의 영적 흐름을 계승해 왔다고 큰 소리로 주장하는 이른바 복음주의자들도 포함됩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서 그분을 주님(Lord)과 그리스도(Christ)로 선포하셨고, 또 그분의 몸된 교회를 다스릴 절대 주권을 그리스도께 부여하셨다는 것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기본 교리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위가 주님의 것입니다.그리고 주님은 때가 되면, 그 권위를 마음껏 행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진행되는 이 시점에 있어서는 그 권위가 도전받고, 때로는 무시되는 것도 허용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지금 주님의 그 권위가 세상에서 도전받고, 교회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위치는 마치 제한받는 입헌군주국의 왕의 위치와도 같습니다. 그런 나라의 왕은(때로 '왕관'이라는 용어로 비인격화시킬 때도 있지만)국가(國歌)나 국기(國旗)처럼 일치와 충성의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고, 환호하고 지지하지만, 그의 실권(實權)은 작은 것입니다. 그는 명목상으론 전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首長)이지만, 위기에 처할 때마다 결정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공식 행사가 있으면 으례 왕의 예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만, 그 나라의 실권자가 지시한대로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연설을 몇 마디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럴싸한 겉치레에 불과합니다(영국의 입헌군주제나 일본의 천황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역자주). 그렇다는 이유로해서 사람들은 아무도 이것을 포기하려 들지 않습니다.(전통과 허식때문에)

 

지금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사랑 받는 상징적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는 교회들의 국가(國歌)이고, 십자가는 그 공식 깃발입니다. 그러나 매주마다 각 교회에서 치러지는 행사와, 교인들이 날마다 행하는 행동에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따금씩은 그리스도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실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일단 그 말씀이 끝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모든 것을 주관합니다. 실제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교회의 도덕적 표준을 설정하고, 목표를 정하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을 결정합니다. 교회 조직은 너무도 방대하고 복잡하여, 이제는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회자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실제 권위를 더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의 혹은 전혀 소유하지 못하신 것은 권위(Authority)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향력도 점차 감소되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권위나 영향력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권위나 영향력이 갈수록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미()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력과 흡사합니다. 정직한 링컨은 아직도 이 나라 국민들의 우상입니다. 그의 친절하고 꾸밈없는 얼굴은 아름다울 정도로 소박하여 미국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링컨의 사랑과 정직, 그리고 겸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주관할 정도로 성장한 후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링컨은 기껏해야 하나의 훌륭한 모범(example)으로만 남아 있을 뿐, 점차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색해져 권위도 떨어지고 실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건달들도 링컨의 긴 검정예복을 입고 다니려 합니다. 차고 냉혹한 미국 내 정치문제에 있어서 링컨의 이야기는 정치인들 사이에 냉소적인 농담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주권을 완전히 망각해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상 주님의 주권은 거의 찬송가 가사 속에만 귀속되어 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며 종교적으로 유쾌한 감정이 불타오를 때 사람들은 주님께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주님의 권위를 교실에서 이론적으로 가르친다해도, 거의 실생활엔 적용되지 않습니다. 복음적인 일부 크리스천들마저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그 지체들의 삶의 세밀한 부분에 대해 절대적이며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교회''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 우리 모임의 믿음과 실천과 윤리와 활동들을 신약교회와 동일시합니다. 그 모임에서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성경적이라고 여기며,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모임에서 우리가 바쁘게 활동하는 것을 바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자유롭게 해석하면서 순종하거나 거부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만이 궤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도 순종을 요구하는 엄격한 말씀을 대하게 될 때에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훌륭하고 복잡한 설명을 합니다. 이것들은 육신을 위해 인위적으로 짜 맞춘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불순종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 육적인 것으로 위안을 얻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닐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축소해서 해석한 후 그것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참고의 대상이며,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추구의 대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능력이 뛰어난 영적인 정신과 의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죄책감에서 해방시킬 수 있고, 또 그들로 사회와 그들 자신의 본능에 원만하고 쉽게 적응하게 함으로써,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피하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의 그리스도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참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그러나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해주는 이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들의 종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거의, 혹은 전혀 권위가 없다는 저의 주장을 뒷받침할 보다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해야 할 것같습니다. 이 일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 답함으로써 증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교회 당회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을 결정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찾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글을 읽고 있는 교회의 당회에 참석해 본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당회 일원이 주장의 근거로서 성경을 인용하거나 의장이 특별한 문제에 관하여 주님께서 형제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당회 모임은 일반적으로 공식적인 기도나 "적절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 후에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은 침묵을 지키시고, 실질적인 지도자가 모임을 이끌어 나갑니다. 만약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논박할 증거를 제시해 주십시오. 저는 기꺼이 그 증거를 듣고자 합니다.

 

어느 주일학교 교사회가 그들의 방향 설정을 위해 말씀에 의지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교사들은 항상 자신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미 알고 있고,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목표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좀더 효과적일까? 하는 것입니다. 계획과 규칙과 '전략'과 새로운 방법론적 기술들이 그들의 전 시간과 관심을 차지해 버립니다. 모임 전 기도는 그들이 세운 계획을 이행함에 있어 단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주님께서 분명히 그들에게 주실 교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들 머리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의장이 성경을 사용할 목적으로 그것을 들고 회의에 참석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회의록과 회칙들과 기타 규정들은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성한 명령은 없습니다. 결국 기도 시간과 회의 시간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자와 후자는 서로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선교회가 진정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에 의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실질적으로 애쓰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 자신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행하는 것은 자신의 목표가 성경에 기초를 둔 것이라는 가정 하에, 다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발견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획한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조력자 일 뿐, 주님이 아니십니다. 거룩한 목적이라는 가정 하에 이를 성취하기 위해 인간적인 수단을 모색합니다. 그것이 정책으로 결정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주님은 전혀 투표권을 갖지 못하시게 됩니다.

 

또한 공중 예배가 행해질 때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사실, 오늘날 주님은 거의 예배(모임)를 주관하지 않으시고, 끼치시는 영향력도 매우 적습니다. 우리가 주님에 관해 노래하고 설교하지만, 주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마음대로 예배(경배)하고,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교회들도 우리처럼 그렇게 늘 행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 중에 도덕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될 때, 권위 있는 답변을 얻기 위해 산상수훈이나 신약성경을 찾아가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구제, 산아제한, 가족부양, 개인의 습관, 십일조, 여가생활, 매매 등 그밖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최종적인 권위로 여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경학교로부터 신학교에 이르기까지 만약 그리스도를 그들 학교의 모든 시책에 있어서 주님으로 모신다면, 어느 학교가 운영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런 학교가 몇이나 있을까요? 저는 그런 학교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학교들조차도 대부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다고 표방한 성경에 정당화될 수 없는 방법들을 채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결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변칙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르치는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권위가 무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권위가 상실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저는 그 가운데 두가지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하나는, 비교적 오래된 종교집단 속에 있는 관습과 선례와 전통의 세력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마치 중력과 같이 그 단체 안에 있는 모든 종교적 관습에 영향을 미치며, 한 방향으로만 꾸준하고 지속적인 압력을 가합니다. 물론, 그 방향은 옛날 모습 그대로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관습이 주인이 됩니다. 이런 현상은(약간의 정도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순복음 교회, 성결 교회, 오순절 교회, 근본주의 교회는 물론 북미 대륙에 산재한 많은 독립 교회들과 초교파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견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지성주의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의 관찰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는 지식에 대한 열망보다는 지식인이라는 명예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마땅히 그 이상의 좋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할 훌륭한 사람들이 사실상 적들에게 동조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저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진정한 신앙이라 생각합니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서방세계에서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더 이상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우리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물을 손에 들고 이제는 웃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맹세하기를 그도 우리 조상들의 신앙을 믿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최소한 그 믿음을 약화 내지는 변질시켜서 과거와같이 초자연적인 것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철학, 심리학 혹은 인류학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여, 매우 합리적인 이야기로써 우리의 역사적 입장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보라고, 너무 그렇게 완고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고, 보다 관용하면서 보다 넓게 이해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는 거룩해 보이는 학술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많은 수의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그에게 아첨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는 미국의 큰 부자 록펠러(Rockfeller)가 농부들의 자녀들에게 동전을 던져 주었듯이, 이 선지자들의 자녀들에게도 학위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한동안 교육정도가 얕다는 평을 받던 복음주의자들이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럴듯한 학위를 받아 이 지위의 상징을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게 되면 그들은 거의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교회 찬양대의 독창자가 스칼라 극장(이탈리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극장의 하나-역자주)에 초청을 받았을 때처럼 황홀감에 도취되어 불신 상태에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모든 종교적 활동의 건전성과 그 궁극적 가치를 결정하는 최고의 시금석은 우리 주님께서 그 활동 안에서 차지하시는 지위가 어떤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상징이십니까? 주님은 그곳의 선장이십니까 아니면 한 사람의 선원에 불과하십니까? 주님께서 모든 일을 결정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결정한 것을 다만 돕고만 계십니까?

 

크리스천들의 지극히 단순한 행동에서부터 온 교회의 막중하고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적 활동의 가치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 주인이 되어 계십니까?" 마지막 심판날에 우리의 행위가 나무나 건초나 짚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날지, 아니면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날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여하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고전 3:10-12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들 각자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적어도 세 가지의 선택사항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첫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가 무책임한 비난을 하고 있다고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에 지적한 말에 일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자신만큼은 예외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린 것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신 교회의 머리와 주()로서의 지위를 주님께 드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주님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에 대해 자백하는 것입니다.

 

첫째나 둘째 것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선택을 그 결론대로 이행하면, 저주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1963515[증인연맹] (The Alliance Witness)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틀 전에 토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소천한 것과 이 글을 성령께서 주시는 무거운 짐이라 그가 토로한 것을 볼 때, 이 글은 기독교계를 향한 그의 눈물어린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란 말 대신 "성경의 권위"란 말을 대입하여 이 글을 읽어도 좋으리만큼 "성경! 성경! 성경!"을 부르짖는 교회 안에서 성경의 권위가 무시되는 오늘날의 현실은 토저의 글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하고 말하는 자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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