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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20과 보충자료(또다른 보혜사) | 백인범 | 2020-05-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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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혜사 (요 14: 16-21) 주님이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가진 마지막 시간에 주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가 오늘 본문에 나온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이다. 주님은 이 다락방 말씀에서 모두 5번에 걸쳐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1. 또 다른 보혜사(another Paraclete)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보혜사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A. 보혜사(保惠師, paraclete): Helper, Comforter, Advocate, Counselor.. 개역성경의 보혜사란 단어의 한자 의미를 풀어보면, 지키고 편안하게 하고 돕는다는 의미의‘보(保)’와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혜(惠)’그리고 선생님을 가리키는‘사(師)’가 결함된 단어이다. 그러니까 지키고 편안하게 해주고 도와줄 뿐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선생님이다 하는 뜻이다. 이렇게 보혜사라는 단어는 어느 한 단어로는 그 의미가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 뜻이 풍성한 단어이다. 영어성경들이 여러 단어로 다양하게 번역을 한 것을 볼 때 그 뜻이 얼마나 풍성한 단어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Helper(ESV, NASB), Comforter(KJV), Advocate(NRSV), Counselor(NIV, NLT, RSV)..등 다양하다. 변호자, 중재자, 위로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인 Paraclete 이라고 번역을 한 영어 성경도 있는데 이것은 헬라어 parakletos 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우리말로 해도, 기운을 복돋아 주는 위로자, 상담자, 도움을 주는 분, 후원자, 조언자, 변호인, 동지, 노련한 친구 등 매우 다양하다. 당시 헬라세계에서‘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는 법정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대변하고 변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것이 전문적인 변호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고, 증인으로서 말할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호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의미들이 ‘보혜사’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혜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호하고 변호하고 도와주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B.‘또 다른’(another): 보혜사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단어가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another Paraclete)”라고 하실 때,‘또 다른(another)’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다. 헬라어에‘다른’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다. allos 와 heteros 이다. ‘allos’는 똑같은 종류, 성질을 가진 것 중에서 다른 하나라는 의미이고, ‘heteros’는 완전히 다른 종류, 다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실 때 allos parakletos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과 똑 같은 성질을 가지신 분인 성령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이 보혜사라고 많은 분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보혜사는 두 분이다. 원래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고,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님이다. 두 분이 다 보혜사인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이 보혜사다 하는 말은 요한일서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대언자라는 단어는 보혜사와 똑같은 단어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성부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대언해주고 계시다. 예수님이 원래의 보혜사이신 것이다.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과 동일한, 똑 같은 분이신 보혜사이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제자들을 떠나셔야 한다. 이 때 주님은 당신은 비록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제자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또 다른 보혜사, 예수님과 똑 같은 일을 하시고, 똑 같이 제자들을 인도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가르쳐 주실 성령님을 보내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염려하거나 불안해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더욱 잘된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은 몸에 제한을 받으셨으나 성령님은 그런 제한이 없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가르쳐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다고 하시는 것과는 달리, 성령님은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까지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16:7). 주님이 떠나가셔야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2. 진리의 영 이렇게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멀리는 신자와 교회들에게 허락해 주신다. 또 다른 보혜사의 특징을 주님은 17절에서‘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의 주된 사역이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믿는 자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더하시고 변호하시는데, 말씀 곧 진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기록된 말씀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것을 수단으로 일하신다. 성령님을 생각하면 뭔가 기적이 일어나고 방언과 같은 은사들이 나타나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큰 오해다. 어떤 분들은 순복음교회 같은 은사주의교회에는 성령님이 충만히 역사하시는데, 장로교회에는 그렇지 않다고 쉽게 판단하여 말씀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의 경우, 바로 위와 같은 오해에 기인하여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신다. 진리를 중심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은, 첫째는 성경을 쓸 때에 성경 기록자들에게 영감(inspiration)을 주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쓰게 하셨다는 것이다.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는 조명 (illumination)이다. 성령님께서는 지적인 조명을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은 결과로 진리를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 말은 목사나 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거나 거듭난 사람이 중생의 순간에 모든 영적 지식을 다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어떤 인간 중재자가 없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있게 적용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한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깨달아지고(조명)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내게 적용하시고 사용하실 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리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결과적으로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게 하신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거짓은 그 앞에서 드러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헌금을 속인 것을 사도 베드로는 그들이“성령님을 속였다”고 말했다(행 5:3). 이런 사건 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실 때, 모든 무분별과 무질서는 사라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원리가 세워지게 된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라. 3. 세상과 교회의 근본적 차이: 성령님 성령님을 아는가 모르는가는 결정적으로 세상과 교회,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다. 주님은 세상이“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저를 아나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사용된 세 개의 동사를 주목해 보십시오. ‘받다’, ‘보다’ 그리고 ‘알다’이다. 이 단어들은 모두 요한이 믿음을 설명하는데 사용한 단어들이다. 세상은 이 믿음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련도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을 안다. 안다는 표현은 특히나 요한에게 있어서 믿음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거나 혹은 믿음보다도 더 강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이다. 신자들은 성령님을 안다. 그들은 그분을 경험한다. 어떻게 경험하는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0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내 뼈와 관절을 찌르듯이 파고 들고, 그래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그런 말씀의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성령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내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 아무리 두드러진 은사가 나타나고 방언을 한다고 해도 성령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는 한, 성령님도 인정하지 못한다. 다시말해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면 그는 성령님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교회의 차이, 비기독교인과 거듭난 기독교인의 차이는 성경을 많이 아는가가 아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가도 아니다. 결정적 차이는 그가 성령님을 아는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가 이다. 4.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 안에서 신자 안에 오셔서 거하신다(23). 우리가 오늘 성령님께 대한 이 짧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16절 하반절과 17절 하반절이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것을 보통 {성령님의 내주}라고 말한다. 보혜사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은‘영원토록’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조건적 내주하심이 아니라 영원한 내주하심이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신자의 거룩함의 유무나 정도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7절 하반절에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다. 먼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임재 하신다는 것을 가리키며, ‘너희 속에 계심’이라는 말은 개개인의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거하신다, 계신다’는 단어들은 단순히 장소나 거주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강한 인격적 관계를 반영하는 표현들이다. 부부가 한 몸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하나됨의 관계를 표현해주는 것과 비슷하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는 말씀은 단순히 성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3위이신 성령님께서만 신자 안에 오셔서 내주하신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신다. 그리고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시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성자이신 예수님과 성부 0께서 함께 성령님 안에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23절“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여기서‘우리’가 누구인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 안에서 믿는 자에게 오셔서 그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말씀이다. 믿어지는가?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 거듭난 모든 분들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되,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내주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엄청나고도 영광스러운 사실을 아는가? 5. 능력인가, 인격인가?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프뉴마’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본래 중성 명사이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지만, 헬라어 문법에는 중성대명사‘그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남성대명사‘그분’혹은‘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님은 {그분}이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가 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17절에서만 유일하게 중성 대명사를 쓰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능력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이다. 성령님에 대해서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능력으로만 아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고, 기도를 능력있게 하는 것이며, 병을 고치거나 뭔가 가시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주로 성령님의 역사라고 이해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에 대하여 뭐라고 하시는가? 성령님은 보혜사다. 하시는 일과 역할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역할을 동일하게 모든 신자들에게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 옆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성령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신다.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성령님을 인격으로 아는가, 능력으로 아는가의 차이가 무엇일까? 매우 단순한 차이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님을 능력으로 안다면, 여러분은 교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현상이나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계속해서 점점 교만해져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성령님을 인격으로 안다면, 여러분은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크고 거룩하신 성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와 같이 비천한 죄인에게 찾아 오셨는지, 내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수가 있는지, 그 은혜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겸손해 지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은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짜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교만해진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이렇게 확연하다. 그 차이는 너무나 다른 길이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하나는 사망의 길인 것이다 성령님을 성 삼위 하나님의 제3위이신 인격으로 아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6. 우리는 보혜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15:5).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주시는 이유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그 보혜사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15장에 가서 말씀신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b).” 보혜사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거듭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보혜사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주님을 섬길 수도 없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또 다른 보혜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떠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이유다. 그 분이 없이,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위협하는 당국의 금령을 어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령님이 없이는 사도행전도 없고, 교회의 역사도 없고, 전도도 선교도 없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약속하신 그분, 또 다른 보혜사를 필요로 한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성령님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을 읽을 때/ 출근할 때/ 잠을 잘 때/ 일을 할 때/ 우리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필요로 한다. 우리 교회가 보혜사 성령님을 필요로 한다. 보혜사의 도우심이 없이는 교회가 교회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온갖 세상의 더러운 꼴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고, 불필요하고 낙심하게 하고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이야기들이 우리가 모인 자리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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